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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향신문] 임상혁 녹색병원 노동환경건강연구소장
  • 글쓴이 관리자
  • 작성일 2015-04-28 11:23:48
  • 조회수 4767

경향신문  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id=201410312126515&code=210100

 

 

[창간기획 - 쉰살, 구로공단과의 대화]임상혁 녹색병원 노동환경건강연구소장 “전자제품 회사 세척제 많이 써… 수은 등 중독 노동자 각지서 찾아와”

ㆍ(6) 한국 첫 노동자 건강 위한 ‘구로의원’ 원장 지낸 임상혁 소장

“초등학교 6학년짜리 애였어요. 가끔 멍이 들어 병원에 오길래 ‘누구한테 맞았느냐’고 물어도 대답을 안 해요. 같이 사는 할머니에게 알아봤더니 아빠가 때린다고 해요. 구로공단의 슬픈 역사인데, 공단에서 일하던 청춘 남녀가 자연스레 사랑을 하고 아이를 낳게 되죠. 그런데 남편이 공장에서 손이 잘린다든지 하는 재해를 입는 경우가 많았잖아요. 보상받은 돈으로 분식집 같은 걸 차리는데, 처음엔 장도 봐주고 열심히 하지만 식당 일은 여자가 주로 하게 되니까 남자는 결국 술에 빠지고 여자를 때리는 거죠. 못 견뎌 여자가 집을 나가면 남은 애한테 폭력을 휘두르고 아예 학교도 안 보내요. 그렇게 방치된 애들은 초등학생인데도 본드를 해서 해롱거리며 다닐 정도였죠.”

1994년부터 1997년까지 구로의원 원장을 지낸 임상혁 노동환경건강연구소 소장(50)은 구로공단의 ‘기억’을 아리고 슬픈 얘기로 시작했다. 직업환경의학 전문의인 그가 봤을 때 불행의 씨앗은 산재였다. “다치지 않았으면 어땠을까, 다쳐도 치료를 제대로 받아서 다시 일할 수 있었다면 어땠을까 하는 생각을 떨칠 수 없었습니다.”

지난 29일 찾은 서울 중랑구 녹색병원 내 노동환경건강연구소 사무실에는 ‘노동이 아름다운 세상’이라고 쓰인 액자가 걸려 있었다. 구로의원 시절 만난 노동자가 몇 해 전 직접 써서 선물했다고 한다. 반대쪽 벽에는 연구소가 중금속 피해 역학조사를 하고 있는 김포지역 지도가 붙어 있었다. 지도에는 ‘폐전선 소각’ ‘우레탄 소각’ 등의 문제 지점이 표시돼 있다. 의료인으로서 첫발을 디딜 때부터 지금까지 노동자를 위해 살아온 삶의 궤적이 단적으로 느껴졌다.

“요즘 의대생들한테 왜 의대 왔냐고 물으면, 참 기가 막힌데, 가장 많이 하는 대답이 ‘엄마가 가라고 해서’예요. 두 번째가 안정적이고 전문적인 직종이라고 하죠. 우리 때도 안정적인 직업인 건 틀림없었지만, 어쨌든 나는 사회적 기여나 봉사를 하고 싶다는 막연한 생각을 했어요.”

임상혁 녹색병원 노동환경건강연구소장이 지난 29일 서울 중랑구 녹색병원 내 사무실에서 직접 보고 겪은 산업재해 피해에 대해 얘기하고 있다. 그가 1994~1997년 구로공단의 다친 노동자들을 돌봤던 구로의원은 국내 최초로 노동자들의 건강을 위해 설립된 병원이었다. 김창길 기자


▲ 구로공단 올라온 지 한 달 만에 수은 중독으로 죽은 아이와
원진레이온 직업병에 충격… 안정적 삶보다 노동현장 선택


▲ “기업, 안전을 비용으로 인식… 그럴수록 포기할 수 없죠
계속 얘기하고 바꿔낼 것”


그는 1984년 대학에 들어가서 학생운동에 뛰어들었다고 했다.

“의대엔 사상적인 서클이 거의 없었어요. 그래도 그 시대가 갖고 있던 울분이 있었잖아요. 같은 고민을 하는 친구들끼리 모여서 책 읽고 학습도 했죠. 나중에 데모하다가 잡혀가면 판사가 그래요. ‘의대생도 데모 하느냐’고.”

그는 ‘의대생’이 할 수 있는 일을 했다. 서울 구로·성수동, 인천 등 공단 지역에 노동자 진료소를 만들고, “(의대) 선배들을 꼬여” 진료를 보게 하며, 주말도 없이 일했다. 현실은 참혹했다.

“프레스가 위험한 기계니까 잘못해서 손이 들어가면 자동으로 멈추는 안전장치가 돼 있었어요. 그런데 자꾸 멈추면 에러가 많이 나잖아요. 그렇다고 안전장치를 빼버리는 거예요. 어이없이 손이 잘리는 사고가 사흘이 멀다하고 일어나던 때였죠.”

본과 3학년이던 1988년, 그의 진로를 이끈 2개의 큰 사건이 터졌다. 한국 산업안전보건 운동의 역사를 뒤흔든 사건이기도 했다. “문송면이라는 15살 아이가 수은 중독으로 죽었어요. 시골에 있다가 서울에서 야간학교 보내준다고 해 공단에 올라왔다가 한 달여 만에 죽은 거죠. 말로 할 수 없이 불쌍한 일이었고 노동현장이 이처럼 위험하구나 하는 인식도 불러왔죠.”

원진레이온 이황화탄소 직업병 사건이었다. 그는 휴학을 하고 매달렸다. 당시 의대생이 유급 아닌 자의로 휴학하는 것은 흔치 않은 일이었다. 그만큼 충격적이고 절박했다. 원진레이온 피해자는 900여명에 이르고 사망자도 150명이 넘었다.

“세계적으로 유례없는 불행이었죠. 처음엔 솔직히 좀 무서웠어요. 그런 모습은 한 번도 본 적이 없었죠. 이황화탄소는 뇌에 직접적인 영향을 미치기 때문에 독성 뇌증에 걸리면 기괴한 얼굴 표정과 뒤틀린 몸으로 알아들을 수 없는 소리를 내요. 거길 떠날 수가 있어야죠. 원진레이온이 있던 경기 구리진료소에서 숙식하며 지냈습니다.”

하지만 다시 학교로 돌아가야 했고 1994년 가정의학과 전문의가 될 때까지는 다른 데 눈 돌릴 틈이 없었다. 전문의 자격을 딴 뒤 당시 ‘노동과건강연구회’를 꾸려 열정적으로 활동하던 양길승 녹색병원장을 찾아갔다. 어떤 삶을 살면 좋을지 조언을 들으러 간 것이었다. “돌이켜보면 무슨 얘기를 했는지는 기억이 잘 안 나요. 한 시간 동안 둘이서 소주 4병을 먹었던 기억만 납니다.” 그 길로 그는 구로의원 원장으로 부임했다. 보통 의사 월급의 절반을 받고 주말에도 쉴 수 없는 자리였다. 구로의원은 노동자 건강을 위한 최초의 병원이었고, 임 소장의 첫 직장이었다.

“구로공단은 물론 울산·거제 등 각지의 노동자들이 구로의원에 찾아왔어요. 수은·납·카드뮴·크롬 등 중독 환자들이 많았지요. 특히 세척제를 많이 쓰는 전자제품 회사의 중독 환자들이 줄을 이었죠. 추락하거나 미끄러지는 후진적 산재는 여전했고요. 선진국에선 작업현장에서 뛰어내려 자해하고 싶어도 안되게 해 놓을 정도예요. 우리의 노동현장은 상상하기 힘든 거죠.”

바쁜 와중에도 그는 매달 탁아방을 찾아 예방접종을 해줬다. 죽을 뻔한 아이를 살리기도 했다.

“네 살짜리 아이가 입술이 파래요. 엄마한테 물었더니 ‘원래 약하다’고만 하고. 청진을 해봤더니 심장이 좋지 않았어요. 여성 단체들에 도움을 청하고 심장병재단과 연결돼 수술을 할 수 있었어요. 나중에 알고보니 엄마는 애가 태어날 때 선천적으로 심장이 안 좋다는 말을 들었다고 해요. 그런데도 돈이 없으니, 그냥 포기하고 살았던 거죠.”

1997년 구로의원 원장을 그만두고는 아예 2년간 산재의료관리원에 근무하면서 직업환경의학 전문의 자격증을 땄다. 이후의 삶 역시 자신의 뜻보다 노동자들의 바람을 따라 살았다. 노동환경건강연구소의 설립이었다.

“원진직업병관리재단에서 환자들의 보상 외에 하려던 게 병원과 연구소 설립이었어요. ‘다시는 이런 불행, 우리 같은 노동자들이 나오지 않게 해달라’는 피해자들의 간절한 호소였죠. 근본적인 문제 해결을 위한 제도 개선과 연구 활동, 사회적 운동 등을 위한 일에 뛰어들었죠.”

그렇게 1999년 설립된 연구소에서 15년째 일하면서 그는 근골격계 질환 예방관리법 제정, 노동자 건강검진제도 개선, 석면 피해 구제법 제정 등을 이끌었다. 서서 일하는 노동자들에게 의자를 제공하는 운동에도 연구소가 앞장섰다.


인터뷰 중에 이윤근 연구소 부소장이 들어왔다. 그는 한때 잘나가는 대기업 직원이었다고 했다. “이 부소장은 서울대 보건대학원에서 석사 과정을 마치고 포항제철에서 보건을 담당했어요. 월급도 많이 받았을걸요. 그런데 공장 내 발암물질 논란이 붙었을 때 회사 편을 안 들고 학자들의 손을 들어줬다지요. 회사의 봉쇄를 뚫고 기자회견장에 나타나 소신껏 발언하기도 했고요. 그 일이 있은 후로 회사를 나와 구로의원으로 왔어요. 월급은 전에 받던 돈의 4분의 1밖에 못 줬는데, 좀 미안했지요.”

임 소장은 앞으로 주력할 과제로 서비스업·비정규직 노동자들의 건강권 얘기를 꺼냈다.

“최근 자살하는 사례를 보면 서비스업 노동자들이 많아요. 고객의 폭행이나 정신적 스트레스가 주된 원인이겠죠. 비정규직 노동자들은 아예 산재 통계조차 없어요. 기본이 안돼 있는 거죠. 대기업 노조가 적극적으로 나서지도 않는 상황이고요. 이제는 노동자들의 힘만으로는 안된다고 봐요. 사회적으로 연대해서 의제로 만드는 노력을 계속 해나가야 합니다.”

‘안정적인’ 의사의 삶을 떠나 지방의 노동현장을 찾아다니느라 그는 한 달에 이틀밖에 집에 못 갈 때가 있다고 했다. 농반진반으로 “연구소에서 일하는 게 취미”라는 말도 건넸다. 인터뷰 중에도 그를 찾는 연구소 직원이나 전화가 끊이지 않았다. 그는 스스로 “행복한 사람”이라고 했다.

“후회한 적은 없습니다. 더 열심히 사는 사람들도 많은데 성과가 적은 경우가 있잖아요. 그래도 나는 산업안전 일을 하면서 많은 성과를 거뒀다고 생각해요. 보람도 있고요. 의사들이 노동자들의 입장에서 그들의 건강에 대해 적극적으로 얘기하지 않으면 안돼요. 눈치 보거나 기업 사정을 봐주거나, 실제로 그런 사람들 있잖아요, 그러면 노동자들 건강 지키기가 어려워지죠.”

그는 세월호 참사 이후에 한국 사회가 제대로 변하려면 인식부터 바뀌어야 한다고 말을 이었다.

“그간 기업에서 안전이나 노동자들의 건강이라는 게 부차적이었단 말이죠. 제일 좋은 성과는 아프거나 죽는 사람이 없는 거예요. 아무 일 없어야 하는 거죠. 그런데 그렇게 생각하지 않고 안전을 비용으로 인식하고 있잖아요. 포기할 수 없죠. 계속 얘기하고 바꿔내야 합니다.”

<박철응 기자 hero@kyunghyang.com>


 

입력 : 2014-10-31 21:26:51수정 : 2014-10-31 21:58: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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